<힐링편지 45> 사랑과 성에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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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ㅣ타오러브 조회수 ㅣ6,445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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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성에너지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의 느낌을 알고 사랑하는 삶을 사는 것은 쉽지만 그것을 언어로
표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바다 속의 물고기에게 “바다가 무엇인가?”하고 묻는 것과 같다. 물고기는 “여기가 바다이다. 봐라. 사방천지가 바다이다.”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대답에 만족하지 않고 “그렇게 막연하게 말하지 말고 구체적으로 정의해 보라.”고 한다면 물고기는 아주 곤혹스러워 할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선하고 아름다운 것들, 진실한 모든 것들은
오로지 삶을 통해 구현되고 느낌을 통해 전달될 뿐이다. 그런 것들을 단어로
정의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우리 인류는 삶에서 직접 체득하고 알아야 하는 것들에 대해
수천 년 동안 입으로만 떠들어 왔다. 이것이 우리가 직면한 불행한 일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는 사랑을 논의하고 사랑에 대한 노래를 만들어 낸다. 지구 곳곳에서 사랑의 찬가가 울려 퍼진다. 하지만 실제 우리의 삶 속에는 사랑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인간을 가만히 관찰해 보면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 중에
‘사랑’만큼 거짓된 것도 없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의 물길을 막아버린 사람들,
온갖 거짓으로 사랑을 오염시킨 주범들을 오히려 사랑의 전달자로 착각한다. 이것이 우리가 겪고 있는 불행한 일이다. 세상의 모든 종교가 사랑에 대해 말하지만 그들은 오히려
사랑으로 들어가는 모든 문을 막아버리고 우리를 불행의 나락으로 밀어 넣었다.
이런 점에서는 동서양의 차이가 없다.
인도와 미국이 다르지 않다. 사랑의 강물은 완전히 얼어붙었다. 우리는 그 원인을
찾으면서 인간을 탓하고, 우리의 마음이 사악해서 그런 것이라고 자책한다. 우리의
마음이 오염되었기 때문에 사랑이 피어나지 못하는 것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오염된 것이 아니다.
그렇게 비난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사랑을 독으로 오염시키고 말살한 주범들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도 독(毒)이 아니다. 이 우주의 모든 것이 감로수이다.
이 감로수를 독으로 변질시킨 것은 우리 인간이다. 소위 지도자로 불리는 사람들,
성자로 추앙받는 사람들, 종교적으로 존경받는 사람들이 그 주범이다.
이 점을 깊이 이해해야 한다.
이것을 명확하게 꿰뚫어보지 못하면 우리의 삶에서 사랑이 피어날 가능성은 없다.
수천, 수 만년이 지나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사랑을 짓밟고 있는 것들의 정체를
알아채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들을 기반으로 사랑의 꽃을 피워내려고 한다.
우리는 완전히 잘못된 원칙들을 수천 년 동안 반복하고 암송해왔으며, 그런 와중에 그 원칙들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까맣게 잊었다. 오히려 그 원칙들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인간 자체를 비난하게 되었다.
오늘 날의 인류는 지난 수천 년 동안 쌓여온 문화의 부산물이다.
그런데 비난받는 것은 문화가 아니라 인간이다. 인간은 고통 받고 있는데 문화는 여전히 칭송받는다. “오, 우리의 위대한 문화, 우리의 위대한 종교!”라고 찬양하는 소리가 드높다. 그러나 오늘날의 인류를 보라. 그 위대한 문화와 종교의 결실을 보라!
아무도 과거의 종교와 문화를 탓하지 않는다.
현재의 인간이 잘못되었으니 먼저 우리가 변해야 한다는 소리만 드높다.
지난 수천 년 동안 인류에게 사랑을 안겨주지 못했다면 그 동안의 문화와 종교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냐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다.
아무도 감히 그렇게 반박하지 못한다.
그렇게 똑같은 문화와 종교를 기반으로 한다면 장래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지난 수천 년 동안에 실패한 것들이 미래에 무슨 사랑의 꽃을 피워 내겠는가?
미래에도 달라지는 것이 없을 것이다.
동일한 문화와 종교를 기반으로 한다면 오늘 날의
인류는 미래에도 똑같은 모습일 것이다. 조금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그런 문화와 종교, 성자들을 찬양한다.
우리는 그 동안의 잘못된 종교와 문화가 실패 원인일 수도 있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 아직 그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과거의 문화와 종교가 주범이다!
세상을 보라. 오늘 날의 인류가 그 증거이다. 다른 증거가 필요한가?
씨앗을 심었는데 독과(毒果)가 열렸다면 이것이 무엇을 증명하는가?
씨앗 속에 독성분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씨앗에서 독과가 열릴지 미리 알기란 어렵다.
씨앗을 주도면밀하게 살펴보고 으깨어서 관찰해도 거기에서 독과가
열릴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렇다면 씨앗을 심어보라.
새싹이 돋아나고 나무가 자라날 것이다. 가지가 무성해지고 마침내
열매가 맺힐 것이다. 그런 다음에야 그대는 그 씨앗이
독을 갖고 있었는지 알게 될 것이다.
과거 수천 년 전에 씨앗이 뿌려지고 양분을 빨아먹으며
자라온 문화와 종교의 결실이 바로 오늘 날의 인류이다. 그 열매를 보라.
혼란과 증오심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는 그 씨앗들을 칭송한다.
아직도 그 씨앗들에서 사랑이 피어날 것이라고 기대하는가?
분명하게 말하건대, 그런 기대는 버리는 게 좋다.
사랑이 피어날 가능성 자체가 말살되었기 때문이다. 종교가 그 주범이다.
인간보다는 새와 동물, 나무들에게서 더 많은 사랑을 엿볼 수 있다.
종교도 없고 문화도 없는 그 생명체들이 더 사랑으로 충만하다.
소위 진보된 종교와 문화를 갖고 있는 현대의 문명인들보다 밀림 속의 원시
부족들이 더 사랑하는 삶을 살아간다.
문화가 발전하고 문명화 될수록, 종교의 입김이 거세지고 교회와 절이 늘어날수록 사랑이 메마르고 인간은 더 황폐해진다. 왜 그런가? 틀림없이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중에 두 가지 점에 대해 논의하고 싶다. 이것을 잘 이해하면 막혀있던 사랑의 물길이 다시 트이고 강물처럼 흐르게 될 것이다.
사랑은 모든 인간 속에 내재되어 있다. 어딘가 다른 곳에서 가져와야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을 찾기 위해 다른 곳으로 갈 필요가 없다. 사랑은 모든 인간 속에 잠재한 생의 열정이다. 이 삶에서 피어나는 향기 자체가 사랑이다. 그런데 이 사랑이 사방으로 높은 벽에 가로막혀 발현되지 못하고 있다. 커다란 암초들에 막혀서 물길이 흐르지 못한다.
사랑은 어딘가 다른 곳에 가서 배워야 하는 것이 아니다.
한 조각가가 바윗돌을 쪼고 있었다. 어떤 방문객이 옆에서 지켜보니 아무리 기다려도 조각상이 만들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조각가는 끌과 정으로 여기저기를 쪼아대고 있을 뿐이었다. 참다못한 방문객이 말했다.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조각상을 만드는 게 아닙니까? 나는 조각상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보려고 왔는데 당신은 그저 바위 덩어리를 두들기고만 있군요.”
조각가가 말했다.
“진짜 조각상은 이미 안에 들어 있지요. 그것은 만들어지는 게 아니랍니다. 그저 불필요한 부분을 털어내기만 하면 조각상이 드러나는 것이지요. 조각가는 그 상을 발견하는 것이지 만들어 내는 게 아닙니다.”
사랑은 모든 인간의 내면에 잠들어 있다.
다만 그것을 흔들어 깨우기만 하면 된다. 문제는 어떻게 만들어
내느냐가 아니고 어떻게 발견하느냐 하는 것이다. 사랑이 표면으로
드러나는 것을 방해하는 어떤 요인이 있음에 틀림없다.
우리 스스로가 그런 장벽을 쌓아왔다.
의사들에게 건강이 무엇인지 물어보라.
세상의 어떤 의사도 명쾌한 해답을 주지 못한다.
의학은 건강에 대한 학문인데 그들 중에 건강이 무엇인지 말해줄
사람이 하나도 없다니 이상한 일이지 않은가? 의사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질병과 증상입니다. 각 질병에 대한 의학용어와
처방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건강이라니요?
나는 건강에 대해 아무 것도 모릅니다.
우리는 질병이 없는 상태를 건강하다고 말합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건강은 인간 안에 잠재된 어떤 것이다.
우리의 능력으로는 그것을 정의하는 게 불가능하다.
질병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므로 정의가 가능하지만 건강은 우리 안에
내재된 것이므로 어떤 말로도 정의내릴 수 없다.
다만 우리는 질병이 부재하는 상태를 건강하다고 말할 뿐이다.
하지만 건강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도 없는 이런 말을 ‘정의’라고 하기는 힘들다.
건강은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이미 내재된 것이다.
다만 질병에 가려져 있거나, 병이 나으면 스스로 드러날 뿐이다.
건강은 우리가 본래 타고난 것이다.
사랑도 이와 같다. 사랑은 우리의 본래적인 천성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사랑의 능력을 계발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애초부터 잘못된 일이다. 문제는 사랑을 계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드러나지 않는 이유를 관찰하고 그 이유를 밝혀내는 것이다.
무엇이 우리 안의 사랑을 방해하는가? 어떤 장애가 있기에?
무엇이 장벽인가?
아무런 장벽도 없을 때 사랑은 저절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사랑에 대해 가르치고 설명할 필요가 없다.
잘못된 문화와 세뇌에 의한 장벽만 없다면 누구나 사랑으로 충만해진다.
사랑은 필연적인 것이어서 누구도 거기서 도망칠 수 없다.
그것은 우리의 천성이며 자연의 선물이다.
히말라야에서 발원한 갠지스 강이 바다로 흘러간다.
물은 흐르는 것이 천성이다. 강물은 경찰이나 성직자에게 바다가
어느 방향에 있는지 묻지 않는다. 강물이 사거리에 멈추어 서서 교통순경에게
“바다로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합니까?”하고 묻겠는가? 아니다, 강물은 내재한
천성에 따라 저절로 바다를 발견하도록 되어 있다.
산이 가로막고 바윗돌이 놓여 있어도 강물은 길을 발견한다.
강은 산을 돌고 평원을 가로질러 마침내 바다에 도달한다. 바다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건 문제되지 않는다. 강물은 안내 책자와 지도가
없어도 확실하게 바다에 도착한다.
그러나 댐이 가로 막혀 있다면?
거대한 인공 구조물이 강을 막고 있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자연적인 장애물은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 그러나 인공적인
장애물이 놓여 있다면 강은 바다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이 차이점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자연 속에 있는 어떤 장애물도 실제로는 장애가 아니다.
산이 막혀 있어도 강은 틀림없이 바다에 도달한다. 그러나 인간이
인공적으로 장애물을 설치해 놓는다면 강물의 흐름을
막아서 바다에 이르지 못하게 한다.
자연 속에는 근본적으로 통합된 질서와 조화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겉으로는 장애물처럼 보이는 것도 실제로는 에너지를 고양시키는
장치이다. 잠재해 있는 능력을 자극하고 일깨우기 위한 배려인 것이다.
우리가 땅에 씨앗을 심을 때를 생각해 보자.
겉으로만 보면 흙이 씨앗을 내려 눌러서 성장을 방해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다르다. 흙이 없으면 씨앗이 싹을 틔울 수 없다.
흙은 씨앗을 무르게 하고 해체시켜서 싹으로 변형시킨다.
겉으로는 흙이 씨앗을 방해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성장을 도와주는 친구인 셈이다.
자연은 화음을 이루는 심포니이며 상생(相生)의 장이다.
그런데 인간은 인공적인 손질을 가하여 자연을 훼손했고,
우리가 발명한 기계 장치들은 자연스러운 생명의 흐름을 막아버렸다.
많은 강들이 더 이상 흐르지 못하게 되었고 이제 우리는 강이 썩었다고 한탄한다.
우리는 싹이 나지 않는다고 씨앗을 탓하지 않는다.
우리는 토양이 좋지 않았거나 수분과 햇빛이 부족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상식적인 추론이다. 그런데 누군가의 삶에 사랑이 결여되어 있을 때
우리는 “ 그건 네 잘못이야.”하고 당사자를 비난한다.
그가 자라온 토양이 적합하지 않았거나
물과 태양이 부족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토양이 좋지 않아서 그가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지 못한 것이라고 이해해 주지 않는다.
모든 장애물은 인류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랑의 강물은 도도하게 흘러 삶이라는 바다에
도달했을 것이다. 이것이 자연의 순리이다. 사랑의 강물로 흘러서 신성의 바다에
도달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이다.
사랑의 여정에서 성(性)은 그 출발점이다.
갠지스 강의 발원지가 강고트리(Gangotri)인 것처럼 성은 사랑의 발원지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성을 적대시한다. 세상의 모든 문화와 종교, 스승이나 성자로 불리는 모든 사람들이 성을 적대시한다. 이것은 강고트리 자체를 공격하여 갠지스
강의 흐름을 막아버리는 것과 같다.
“섹스는 죄악이다. 섹스는 비종교적인 것이며 독처럼 해로운 것이다.”
우리는 이런 소리를 수도 없이 들어왔다. 성에너지가 사랑으로 변형된다는 말 따위는 이제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사랑은 변형된 성에너지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다이아몬드를 보라. 다이아몬드는 석탄이 변형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삶에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석탄과 다이아몬드는
본질적으로 아무 차이도 없다. 구성 원소가 동일하다. 석탄이 장구한
세월을 거치면서 다이아몬드로 다시 탄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석탄은 가치있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다이아몬드 장신구를 자랑하는 사람은 있어도 집에 석탄을 모셔두고
손님에게 자랑하는 사람은 없다. 석탄과 다이아몬드는 똑같은 원소로 되어 있지만
겉으로는 아무 연관성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동일한 원소들이 행하는 시간 여행에서 석탄과 다이아몬드는
각기 다른 두 지점에 위치할 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인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석탄이 숮검댕이처럼 보인다고 업신여긴다면 그것이 다이아몬드로
변형될 가능성을 무시하는 것과 같다.
석탄이 다이아몬드가 되듯이, 성에너지는 사랑으로 변형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성을 업신여기고 적대시한다. 사회에서 소위 선하다고
하는 사람들도 성을 반대한다. 이런 적대감은 씨앗이 싹터서 나무로
자라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것은 사랑의 근본토대를 파괴하는 일이다.
첫 단계부터 짓밟아 버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식으로는 석탄이
다이아몬드로 변형되지 못한다. 진보와 변형이 일어나려면 석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우선인데 우리는 무작정 석탄을 적대시하고
무시한다. 그런 식으로 무슨 변형이 일어나겠는가?
우리는 우리 자신이 지닌 에너지에 맞서 싸우도록 세뇌되었다.
성에너지를 억압하고 물리치도록 교육받았다. 표면적으로는 갈등과 마찰을
삼가하도록 교육받은 것 같지만,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는 전투적인
태세로 맞서야 한다는 이념에 세뇌되었다.
“마음은 독이니 그것에 맞서 싸워라. 섹스는 죄악의 근원이니 그것을 물리쳐라!”
표면적으로는 갈등을 멈추도록 교육받은 것 같지만,
그런 교육 자체가 인간의 내면에 갈등의 불씨를 일으킨다. 이것은 한편으로
사람들을 미치광이 상태로 몰아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정신병원을 여는 것과 같다.
한 쪽에서는 질병을 퍼뜨리면서 다른 한 쪽에서 그 병을 고치겠다고
병원을 세우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맥락에 볼 때 ‘인간은 절대 성(性)과 분리된 존재가 아니다.’라는 것을
이해하는 게 대단히 중요하다. 성은 생명의 근원이다. 모든 인간이 성으로부터 태어났다. 이 존재계는 성에너지를 모든 창조의 시발점으로 삼는다.
그런데 소위 성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성을 죄악으로 가득 찬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존재계의 뜻에 반(反)하는 일이다. 만일 창조자인 신이 있고 그가 성을 죄악으로 간주한다면 이 세상에 그보다 더한 죄인은 없다. 왜냐하면 모든 창조는
성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한 송이 꽃을 본다고 하자. 피어있는 꽃을 보고 그것을
사랑의 열정이나 성적인 행위로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꽃이 피어날 때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나비가 꽃 위에 앉아 꽃가루를 묻혀서
다른 꽃으로 전달한다. 정액을 실어 나르는 것이다.
공작새가 날개를 활짝 펴고 춤을 춘다. 시인들이 그 자태를 노래하고,
성자들도 그 모습을 보고 즐거워 할 것이다.
그러나 공작새의 춤이 열정의 표현이며 성적인 행위라는 것을 그들이 알까?
공작새가 춤을 추는 것은 짝지을 상대방을 유혹하기 위함이다. 배우자를 유인하고 있는 것이다. 새들이 노래하고 공작새가 춤추는 것, 어린 소년이 청년이 되고 소녀가 아름다운 여인으로 성장하는 것, 이 모두가 성에너지의 발현이다. 성에너지가 다양한
형태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생명활동, 피어나고 발현되는 모든 것들이 기본적으로
성에너지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세상의 종교와 문화는 이런 성에너지에 반대한다.
그들은 인간의 마음을 독으로 오염시키고 있다. 그들은 우리 자신의 근원적인 에너지에 대항하라고 충동질한다. 그것에 맞서 싸우도록 우리를 부추긴다. 그래서 우리는 애처롭고 비참한 신세가 되었다. 사랑을 두려워하게 되고 위선적인 인간이 되었다.
성에 맞서 싸울 것이 아니라 친구처럼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 삶의 에너지를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우파니샤드 시대의 성직자들은 결혼식을 주선하면서 신부에게 이런 식으로
축복을 내려주곤 했다.
“열 명의 아이를 가진 어머니가 되도록 기원합니다. 그리고 당신의 남편을 열한 번째의 아이로 삼으십시오.”
열정이 변형되면 아내는 어머니가 된다.
욕정이 승화되어 사랑이 된다. 사랑이 꽃피어나는 것은
성에너지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성에 적대감을 갖도록 사람들을 다그친다.
사랑은 성에너지로부터 승화된 것이며, 이런 사랑은 성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때에만 가능하다. 그런데 성을 거부하도록 다그침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속에 사랑의 꽃이 피어나지 못했다.
이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은 점점 더 성에 집착하게 되었다.
성을 적대시했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노래와 시, 예술품과 그림, 사원과
그 안에 서 있는 동상들 모두가 직간접적으로 성과 연관되어 있다.
우리의 마음은 성(性)에서 떠날 줄을 모른다.
세상의 어떤 동물도 인간만큼 성적이지 않다.
하루 스물 네 시간 내내 성적인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깨어있을 때나 잠잘 때나, 앉아있을 때나 걸어 다닐 때나, 성이 모든 것의
중심을 이룬다. 성에 대한 강박관념이 악성종양처럼 자리 잡았다.
성을 적대시하고 억압했기 때문이다.
삶의 뿌리 자체에서 탈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게 무모한 노력을 하면서 갈등에 시달리다 보면 인생 전체가 병들어 버린다.
실제로 우리의 삶이 그렇다. 인류에 만연한 과도한 성욕구의 일차적인 책임은
소위 종교와 문화라고 불리는 것들에 있다.
악한 자들뿐만 아니라 선한 사람과 성자들에게도 책임이 있다.
종교 지도자와 선한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진 이런 그릇된 태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인류에게 사랑이 피어날 가능성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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